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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旅行记

 

북경어 이야기

 

냉전기 40년 이후 한중 수교 이후 변화된 것이 또 하나 있다. 중국의 중요 인사의 방문이 이어지면 틀림없이 방송되곤 했는데, 보통화라고 하는 그들의 언어가 듣기에 너무나 생소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중국어는 홍콩말의 받침들어간 그것이다. 보통화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우리의 한자음과 차이가 컸기에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홍콩영화 붐 이후 대만영화들도 극장에 걸리면서 차차 익숙해져 온 것이다. 현재는 케이블TV(Qing/CCTV)나 위성방송에서도 누구나

쉽게 중국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어휘

 

언어, 특히 문자(글말)는 기본적으로 표시/기록을 하고자 하는 욕구(초기에는 묘사였겠지만)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보다 정교한 과정(글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는 단계)을 거치면서 표음화되었겠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어휘가 널리 통용되고 인정되는 언어공동체 이후일 것이다.

 

어휘가 만들어지고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지배계층에 의한 것도 있겠고, 피지배계층에 의한 것도 있을 것인데 대체로 전쟁이나 민족간에 융합(?)을 통해 어휘가 대폭적으로 수용 확장되는 현상도 잦았던 것이 바로 우리 인류역사이다.

 

표의화

 

초기의 표의문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면서 메시지를 전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지라

발음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따위의 문제는 차선이다. 

철자의 고정화는 한참 이후이다.

영어철자는 표음문자이겠지만 활용하는 과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겠나? 곰곰히 생각해보라.

 

*언어학자 쇼쉬르는 이것을 표음문자의 표의화라고 한다.

 

영어의 경우, 프랑스/라틴/앵글로/독어 계통의 어휘가 복잡하게 뒤얽혀 만들어낸 탓에 

발음과 철자법의 불일치를 가져온 것인데, 우리글과 일본의 가나는 그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쉬운 문자인 것이다. 문제는 입말이 아닌 글말이므로 글말의 본질과 그 목적(예컨데, 표의)에 관해서는 어떤 문자이든 쉽고 어렵고 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상황이다.

 

표음화

 

인류초기의 언어는 음성만이 있었으나 표기를 위해서 표의문자를 개발하였고,

표의는 일정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표음의 요구에 따라 진화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표음화이다.

표음은 기본적으로 표의의 바탕위에 보조하는 것이지 역할은 다른 것이다.

마치 머리와 입과 같다. 처리장치와 출력장치인 셈.

 

중국인이 가장 즐겨먹는 돼지를 살펴보자. 돼지의 대부분은 사천지방에서 사육된다.

돼지를 가리키는 한자표기는 猪(저), 豕(시), 豚(돈), 亥(해), 猳(가), 獜(린), 豵(종) 등 다양하다.

이중 猳 獜 豵은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亥는 결합명사로만 쓰인다(해시亥时 신해辛亥).

 

亥 [hài] 해(상상속의 돼지)

豕 [shǐ] 시 

豚 [tún] 돈

猪 [zhū] 저

 

공통점은 豕을 제외한 나머지는 형성자란 점이다. 표음화된 직후 만들어진 글자라는 말이다.

豕는 돼지의 상형자(象形字)이다. 훗날 돼지고기를 먹는 민족이 합류하면서 음성어휘가 유입되었다.

그들(필자 추정으로는 월족계통)은 일상적으로 돼지를 먹었으므로 돼지는 곧 돼지고기였던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는 [tún]이었을 것이고 이것을 표시할 마땅한 글자를 豚이라는 형성자로 만들어낸 것이다.

豚는 돼지고기를 의미하지만, 猪 (멧돼지, 짐승변 犭)가 사육되면서 야생 개념보다는 돼지, 고기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현재 중국어에는 북방어 음운의 猪 만이 사용되고 있다(일본어는 멧돼지로 이해하고 한국은 豚에 익숙하다).

인류사에 있어서 돼지는 매우 가까운 동물이다. 오죽하면 집(家,  宀(宝盖头) + 豕)이라는 글자에 돼지가 있겠는가.

쉽게 설명하자면 똥돼지를 떠올리면 된다.

 

집을 의미하는 어휘를 예로 하자면,

 

房 [fáng] 방

屋 [wū] 옥

宅 [zhái/zhè] 택 

家 [jiā] 가

 

房 [fáng] 이 어휘가 사용될 당시는 집은 곧 방이었다. 어미접사 子가 붙으면서 '집'으로 쓰인다.
屋 [wū] 지붕이 있는 집을 의미. 오/월국에서 사용되는 글자이다. 현재도 房屋 등으로 쓰인다.
宅 [zhái/zhè] 사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주택(住宅), 택지(宅地)로도 결합되어 쓰인다.

집의 높임말 '댁'은 '택宅'이 한국에서 경어로 정착된 경우이다.
家 [jiā]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돼지와 함께 살던 당시의 가옥형태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단독으로 널리 쓰인다.

 

어휘가 시대성을 같이 한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한어의 기본어휘가 단음절이었음을 상기하면 언제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진 글자인지 알 수 있다.

 

 

문자언어(글말)와 음성언어(입말)간의 일치

 

*진시황의 분서갱유 당시에도 학자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는데, 서로가 다른 문화와 문명,

언어와 관습이 통일에 장애가 되었다고 여긴 것은 아닌가. 후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허신은 이렇게 설명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승상 이사(李斯)를 시켜 당시 진나라에서 쓰던 문자와 자형(字形)이 다른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문자를 통일했다. 통일 문자인 소전(小篆·진시황의 통일 문자 BC221)은 대전(大篆·통일 전 진나라의 문자)의 자형을

대부분 따르되 어떤 글자는 필획을 줄이거나 자형을 고쳐 만들었다.”

(이전에도 소전(小篆)은 계속 사용되어 온것으로 판명)

 

- 후한(後漢)시대 허신(許愼)

 

*세종이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도 당시 각 지방마다 고유 방언도 있었지만, 한자의 독음이 달라서 소통이 쉽지 않았다.

 

*한국의 한자음은 삼국 시대의 상고음과 중고음을 바탕으로 하여 늦어도 10세기 고려 광종
때에 확립되었는데, 신숙주가 1448년 동국정운 서문에 <어리석은 스승이나 선비들이

(1)반절법(중국어 표기법)을 모르고

(2)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몰라서

(3)혹은 글자꼴이 상사하여 한 음으로 하고

(4)혹은 선왕의 휘자를 피하여 다른 음을 빌리며

(5)혹은 두 글자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

(6)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며

(7)혹은 다른 글자를 빌리고

(8)혹은 점이나 획을 가감하며

(9)혹은 중국 한음에 기대고
(10)혹은 우리말 음을 따라서

(11)자모와 칠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고 하였다. 

중국의 한자음은 그렇게 한국에 토착하였다.

 

중국은 음성언어인 방언을 문자언어인 한자라는 일정한 체계로 표시하면서 하나의 동질감을 갖게 되었다.

그 동질감은 유사한 조자체계(형성)를 갖게 되면서면서 더욱더 강력해졌음은 물론이다.

그 동질감이 언어공동체에서 민족단계로 전환되기 까지는 상당시간이 소요된다.

각 지방에는 고유의 관습/문명/역사가 있어왔기 때문. 언어공동체가 유전자적인 민족단위로 묶이면서
극도로 기형적인 대다수와 소수의 구도가 만들어졌고, 결국 기존의 타민족과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권/왕조의 출현이 4대강 같은 성과를 내기위한 것인지

중국의 유일한 여상제(唐朝的女皇帝)인 측천무후(则天武后)는 측천문자(则天文字)을 창안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창안된 글자는 실패하기 쉽다.



 

북경 이야기

 

1989 6 4일 천안문사건 천안문대학살 (天安門事件 天安門大虐殺)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猫白猫) 이후

중국은 선부론(先富論)의 프레임내로 사회질서가 급속하게 변하였다. 사회질서는 결국 부의 분배의 심화로 이어졌다. 민주화열망이 어제 오늘일은 아니었지만, 1989년 당시의 발단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고실업, 빈부격차, 그리고 부정부패였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 주로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담론은 주로 내적 문제에 한정되었다. 예컨데, 학사문제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의 주체가 확산되었고 노동자 수준의 담론이 중심이 되어 갔다.

공산당의 부정부패 수준까지 담론화되면서 쟁점과 요구사항도 구체화되어 갔다. 이것이 반체제 반정권적인 내용을 담아내면서 농성형태를 띄게 된다. 요구사항은 결국 중국의 민주화였다.

(인민해방군/전위대에 대한 불만은 곧 공산당비판으로 연결되니 이것이 현대 중국인의 공산당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다)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 공산당 내 개혁파인 후야오방(胡耀邦 1981~87 총서기)과 자오쯔양(赵紫阳, 1987~1989 총서기)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으나 1982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기대와는 달리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등 민주화 요소를 수용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결국 후야오방은 1987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은 오랜 침묵 끝에 사망했다. 후야오방의 사망은 여러 정치·경제적 부작용으로 들끓은 민심에 불을 부은 것이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모여든 20만명의 군중은 복권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을 알고 분노하였다. 자오쯔양이 방북중이었고 4월 30일 돌아오기까지 사태가 심각해져갔다.

성난 군중이 애국세력에서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세력으로 기사화됐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날 5월 19일 새벽 자오쯔양은 성난군중에게 눈물로 해산하기를 호소하였다.

후에 덩샤오핑과 보수파 지도부는 그를 체포하였고

참으로 잔인하게도 사망(2005년 1월 17일)때까지 가택연금하였다.

 

"6·4 천안문 사태의 잔인한 무력 진압은 명백히 덩샤오핑(鄧小平)의 책임이다."(趙紫陽)

"자오쯔양은 동란(動亂) 편이야. 당도 분열시키고"(鄧小平)

"CIA 첩자들이 동란을 부추겼어. 인민해방군 동원해 쓸어버립시다."(李鵬)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 최고지도부 비밀대화록>

자오쯔양의 회고록 <改革歷程><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

 

 참고 : http://www.jb-breaknews.com/sub_read.html?uid=3381&section=sc5

 

 

크레인 / 구조물을 제거하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두려고 애쓴 느낌

 

 

이곳이 바로 798광장!

 

 

광장내 인공연못 / 금붕어가 있다.

 

 

새로운 구조물을 신축

 

 

조선만수대창작사미술관

 

 

어딘가 친근해보이는 화풍

 

 

성진제강소(현 성진제강연합기업소)

 

"함경북도 김책시 쌍화동에 있는 제강소.

연간 30만t의 강재와 20만t의 강철 생산을 비롯해 스프링강·탄소강·규소강판·합금강·베어링강·알루미늄합금강·피아노선 등을 생산한다.

현재 북한의 9개 공업지구 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지구에 속해 있는 북한 특급기업소이다. 1945년 성진 고주파제강소로 출발해 철강과 기계류 등을 생산했으며, 1959년 연간 20만t 생산능력의 조강공장과 압연공장이 각각 가동되었다. 1961년 중판압연공장과 제선공장이 신설되었고, 1964, 1969년에 각각 열처리공장과 전기로를 증설했다. 제강원료는 김책제철소와 부령야금공장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공업용수는 명천의 어랑천과 길주의 남대천으로부터, 전력은 허천강발전소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평라선(평양-나진)과 단천-길주를 잇는 도로가 지나며, 김책항을 이용한다. 또한 1985년 쌍포와 학성 사이에 무궤도 전차선 공사가 완공되는 등 수륙양면에서 교통이 편리하다. "

 

 

체육관 스러운 건물

 

 

워낙 오래된 건축물이다 보니 개보수중인 건물이 많다.

 

 

 

 

선반같은 기계류에서 뭔가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수증기한번 찍어보려고...

 

 

전자공업단지를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나?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가? 워낙 북경이 크다 보니 통큰 결정도 가능한 법!

 

 

 

예술가 채지송 갤러리

 

 

배가 고파져서 798내의 사천음식점을 찾았다.

맛은 그냥 그냥!

 

 

핸드폰/열쇠고리/가방/다이어리 등 창작된 팬시용품을 판매

 

 

황학동 풍물시장 느낌...

 

 

 

 

 

 

 

 

어디서 본듯한 얼굴...알고보니

내 옆자리에서 밥먹던 그들이다.

 

 

중국의 아파트는 인테리어나 기본적인 가구조차 있지 않으니

IKEA수요가 꽤 있을 것 같다. 한국은 100% 빌트인에 가깝다.

 

 

 

전자상가 / 이곳도 데스크탑 PC가 사라져가고 있다.

PC방에서나 만나게 되겠지.

 

 

 

천안문광장으로 가려면 갈아타야 한다.

 

 

 

참...호텔이 크기도 하다.

 

 

 

 

 

건축중인 북경북역 / 워낙 수요가 많으니 계속 공급될 듯.

 

 

 

 

 

이제 다 왔다.

 

 

천안문동역

광장은 3개역에 걸쳐있다.

 

 

 

 

 

 

 

 

다행히도 통제가 없는 날.

 

 

 

 

이것은 무엇인고!(사진의 전면은 모주석 기념당)

 

 

 

제국의 느낌을 재현하는 것인가?

 

 

 

 

인민영웅기념비 (人民英雄紀念碑)

 

전면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모택동작).

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영웅영수불후

인민 영웅은 영원 불멸이다

 

후면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주은래작).
三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3년 이래 재인민 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 희생된 인민영웅들 영원이 잠들어 불후하리라

三十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們永垂不朽

30년 이래 재인민 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 희생된 인민영웅들 영원히 잠들어 불후하리라

 

 

바로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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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푸우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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