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西安旅行记

 

서안어 이야기

 

동아어족(南亞語族) 분류되는 베트남어의 어휘중 60%가 한어차용어(漢語借用語)이다.

이 차용어는 당연히 월남독서음으로 발음된다. 베트남인의 성과 이름의 거의는 한자를 사용하고 표시된다. 다만, 한자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 베트남 래틴자모를 사용하여 표시한다.

 

阮 응우옌 Nguyễn (38.4%)
陳 쩐 Trần (11%)
黎 레 Lê (9.5%) (예 : 레콩빈)
黃 후엉/후인/호앙 Huang/Huỳnh/Hoàng (5.1%) (예 : 후인퀑탄)
范 팜 Phạm (5%) (예 : 팜탄빙)
潘 판 Phan (4.5%)
武 부 Vũ/Võ (3.9%)
鄧 당 Đặng (2.1%)
裴 부이 Bùi (2%)
杜 도 Đỗ (1.4%)
胡 호 Hồ (1.3%)
吳 응오 Ngô (1.3%)
楊 주엉 Dương (1%)
李 리 Lý (0.5%)

 

예시 :

Nguyen Van Thanh 응웬반탕 (阮文淸 원문청)
Le Chi Minh 레찌밍  (黎志明 여지명)
Tran Quoc Quy 짠…O뀌  (陳國貴 진국귀)
Ly Duc Chau 리득짜우  (李德珠 이덕주)
Pham Huy Thang 팜휘탕  (范輝勝 범휘승)
Pham Trong Phat 팜쫑팟  (范重發 범중발)
Hoang Duy Anh 황주이앙  (黃惟英 황유영)
Ha Thi Hong 하티홍  (河氏紅 하씨홍)
Vu Ngoc Lien 부응옥리엔  (武玉蓮 무옥련)
Do Dieu anh 도지에우아잉  (杜妙英 두묘영)
Dang Xuan Ha 당쑤언하  (鄧春河 등춘하)
Ngo Thanh Thuy 응오탕튀  (吳淸翠 오청췌)

 

중국어에서 입성음(入聲)의 운미(韻尾)가 사라진 것은 송대 이후이며, 원대 이후 완전히 소실된다. 원대 이후의 음은 근대음(近代音) 또는 고관어(古官語)로 분류한다.

입성운미는 북방방언권의 하북성 중부 이북에서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하북성 남부 이남에서일부 입성이 남아 있으나 강력한 보통화정책으로 소실된 것과 마찬가지이고 촌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방언구획이 비교적 선명한 이유는 봉건제로 인한 부분도 크다.

 

남부방언권에서는 비교적 근대 이후 오, , 감과 같은 중부 방언권에서는 북방방언과 마찬가지로 남아있거나 다른 음으로 변이되어 있는 편이다(월/객/민어처럼 입성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매우 독자적이고 자립도가 높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몽/만이 강세지방인 감숙/사천/섬서/하북/동북3성/내몽고는 1000년넘게 지배하면서 음운상 극심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당시 만주인들이 대륙을 장악한 이후 과거를 보려면 만주식 요동방언을 구사해야 했고 새롭게 조자된 '글자'와 '어휘'를 익혀야 했다.

몽/만어는 입성음이 없어 가장 편한 요동방언이 북방방언의 주류가 된 것. 

 

참고 : www.sinology.or.kr/srcll/html/journal/56/5606장재웅.pdf

 

 

우리의 한자 2급에서도 장단음을 구분하는 것과 같이 몽/만지배 이전에는 성조뿐 아니라

음의 장단으로 의미를 구분하였지만, 원/명(이때는 오음이 강세)/청조 이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보통화에 상당히 근접하게 되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년~765년)은 한화(漢化)정책을 펴서 신라의 제반 제도와 관직,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었다. 과거의 지명을 알아보자.

 

서울 - 서울
안동 - 고타야
함안 - 아라가야
아현 - 애오개 또는 애우개
경주(慶州) - 서라벌
대구(大丘) - 달구벌(達句火)
광주(光州) - 빛고을
전주(田主) - 비사벌
춘천(春川) - 소머리고장
강릉(江陵) - 하슬라
속초(束草) - 속새
청주(淸酒) - 마대모로골
충주(忠州) - 불골
상주 - 사벌·사불
부여 - 소부리(부여)
송악,개성 - 솔부리
철원 - 쇠벌·새벌
고구려 - 가우리
백제 - 구다라

  

서안 이야기

 

병마용(兵馬俑)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병마용은 총 4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나 4호 갱은 완성전 폐기된 빈 갱으로 확인됐다.

2호/3호 갱의 규모는 6천㎡와 520㎡로 1호 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3호 갱의 경우 군사 지휘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호갱은 길이 230m, 넓이 612m, 총 면적 1만4천260㎡ 규모이다.

축구장이 길이 120m, 폭 90m이니 꽤 큰 것.

 

 

 

 1호 갱 1979년 개방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한다

 

발견된 세 개의 갱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차(戰車)와 보병(步兵) 번갈아 정렬 되어있다. 길이 2백10m, 넓이 62m, 깊이 4.5~6.5m  면적 1만4천2백60m

 

 

 

 

발굴중인 것 / 착수하지 않은 것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이족이 두려웠던 것일까...

 

 

갱내에 2.5m의 거푸집을 이용한 격리벽이 10개 있으며 남북으로 9개의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그 주위가 회랑으로 둘러싸인 구조. 현재 발굴 출토된 도용이 1천 여 점, 전차가 8점, 도마(陶馬)가 32점이며 각종 청동기가 약 1만점에 이른다. 출토된 병용(兵俑)의 배열밀도로 추산하면 1호 갱에에만 매장된 전체 병마용은 6천 여 점이라 한다.

 

 

웅장함과 규모에 압도된다!

 

 

위에서 바라보면 동단 3열의 병용들은 동쪽을 향해 있으며 매 열은 68점으로 이루어진 군 진영의 선봉이다. 그 뒤로 전차와 보병이 사이사이 배치된 38열 종대는 군 진영의 주력으로 구성되었다. 갱의 남북양측과 서단에는 각각 1열씩 남과 북, 서에 면한 횡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 진영의 양 측면과 후반부 보위를 맡고 있다.

 

 

이런 모습은 2천년 전의 고대 대군의 완전한 진영으로,

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 마저 든다.

 

 

2호갱으로 이동!

 

 

2호갱도 마찬가지로 발굴현장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2호 갱 1976년 발견


 1호 갱의 북쪽 약 20m 지점에 위치, 평면으로 곱자형태를 띠고 있다.

고대군 진영의 비밀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으로 

동서로 96m, 남북 84m 깊이 약 5m 면적이 약 6천평방m.

 

 

 

 

 

모두 4개의 소조로 구성

제 1소조 : 동쪽의 돌출된 부분에 무릎을 꿇거나 서 있는 궁노(弓弩)병들로 구성

제 2소조 : 갱 남반부에 사두마차가 이끄는 전차병이 방진(方陣)을 형성

제 3소조 : 갱 중앙에 전차, 보병, 기병이 함께 편제된 장방진(長方陣)을 구성

제 4소조 : 갱의 북반부로 수많은 기병이 장방진을 치고 있음

 

 

채색이 남아 있는 토용...

 

 

 

청동기...

 

 

 

 

 

 

 

계속 으스스하다. 무덤이라니...

 

 

 

 

 

 

 

 

 

 

어떤 비밀 또는 사연이 있었을까... 

 

 

 

 

 

 

 

 

인상과 동작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신에도 차이가 있단다.

 

 

 

 

 

궁수

 

 

긴장된 표정이라니...

 

 

활과 창은 당시의 기본적인 무기이다.

 

 

 

 

무기고...

 

 

 

*병마용의 발견과정

참고 : www.cn-kr.org/ReadNews.asp?NewsID=244 


 진시황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이자 중국의 국보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진가를 발견하기 전 병마용은 그저 "불길한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6,70년 전 진릉(秦陵) 동쪽의 린통(臨潼)현 시양(西楊)촌에서는 한 농민이 몇일간 우물을 파다가 물은 나오지 않고 실제 사람크기와 똑 같은 진흙인형이 하나 나오자 괴물 같은 인형이 그를 조롱하는 것이라 여겨 나무에 매달고 산산조각을 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50여 년 전 진릉 서쪽에서도 한 농민이 밭을 갈다가 1m 정도의 깊이에서 진흙인형의 머리를 발견하고 계속해서 파내려 가자 머리를 조아린 세 개의 인형이 더 나와 길 한 켠에 버려 두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전날 쟈오쟈(焦家)촌 농민이 2개의 머리를 조아린 진흙인형을 다시 발견했으며 불심이 강한 그 농민은 그 모양이 마치 진흙으로 빚은 보살 같다고 여겨 특별히 토지묘를 짓고 봉양했다. 1974년 3월 시양촌의 한 조합원이 우물을 파다가 원형주둥이 모양의 도자기를 하나 발견하고 다시 파 내려가 보니 그것은 도용(陶俑: 도자기 인형)의 몸통 위에 세워진 질항아리였다. 그는 물이 나오지 않자 또 다시 이 "질항아리"를 불길하게 여겨 매달았다. 수질보호원이 린통박물관으로 가져가 감별을 청했으나 아무도 그 진가를 알아내지 못하자 임시로 박물관에 보관하고 2개월 여에 거쳐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세 개의 도용을 복원해 냈다. 후에 고고학자들의 탐사로 이곳이 바로 장방형의 진대 병마용의 갱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1976년 본격적인 탐사를 거쳐 이 갱의 북쪽 20~25m 지점에서 두 곳의 병마용 갱을 더 발견해 냈다. 그들이 발견한 시점에 따라 각각 병마용 1호 갱, 2호 갱, 3호 갱으로 이름이 지어졌으며 세 갱의 총면적은 2만2천7백80m 이다.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고고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일상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0915 西安旅行记-16  (0) 2010.03.08
20090915 西安旅行记-15  (0) 2010.03.08
20090915 西安旅行记-13  (0) 2010.03.08
20090915 西安旅行记-12  (0) 2010.03.08
20090914 北京旅行记-11  (0) 2010.03.08
Posted by 푸우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