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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灣旅行記

 

"바지 지퍼를 완전히 올리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共褲的拉鏈脫予好。
  ga ko e ziāh kuo(la-liàn) tùa hō hòr  
가코에지아쿠투아호흐

 [hor발음은 '흐'에 가깝게]

 
G : 把褲子的拉鏈拉好。 

bǎ kù zǐ de lā liàn lā hǎo

바쿠즈더라리엔라하오


 

새로운 민어어휘 

共 [ga] 쥐다, 잡다 把

褲 [ko] 바지 褲子

拉鏈 [ziāh kuo] 지퍼 拉鏈

脫予 [tùa hō] 올리다 拉 

 

*참고

처지문(把자문) 형태로 把 + 목적어 + 술어 + 기타 순.

  

 

 

대만이야기

 
1. 중앙공원 인근의 환승역(O5/R10)인 미려도(美麗島)는

영어로 Formosa Boulevard Station이다.

Formosa는 스페인어로 Beautiful island라는 의미.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이겠다. 

 

2. 고웅의 언어 중 주류는 바로 민어이다(민남어 Bâm-lâm-gu)

민동/민남/민중/보선방언 중 기준은 민남의 복건성하문(福建省 厦門)방언이다.

하문방언은 복건성의 장주어와 천주어가 상호 침투하여 만들어진 크레올(creole)어이다. 

민어는 중국어의 모든 방언중에서도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명청 당시의 음운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

한국은 조선 당시 각지방마다 한자음이 달랐는데 그것을 통일시키고자

신숙주를 통해 동국정운을 편찬토록 하였다. 그때,

참고가 된 중국인이 바로 복주사람이었다.

 

현대 북경어는 현존 방언중 자음이 가장 적어 4백음 정도이고 가장 많다는 복건어도 8백 음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한자를 표기하는데 당연히 동음이자가 생기기 마련.

이 단계에서는 성조의 문제가 시작된다. 8~9성조의 한어가 아닌 북방 만족이 배워 사용하던

4성조 동북어(현재의 보통화)가 주류화되면서 큰 소실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1450년(세종32) 명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가 그랬다. 상께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와 성삼문·신숙주 등에게 운서(韻書)를 묻게 하셨다. 태평관에 찾아가 상견례를 마친 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른 음을 알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두 대인을 뵈었으니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사신은 “이 나라의 음이 복건주의 음과 똑같으니 그 음을 따라 하면 되겠소”라고 대답했다. 나와 신숙주는 마침 가지고 간 ‘홍무정운(洪武正韻)’을 가지고 음운의 같고 다름을 강론했다."

출처 : 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6/04/200706040500040/200706040500040_4.html

  

【세종32년 1월3일】직 집현전(直集賢殿) 성삼문(成三問)·응교(應敎) 신숙주(申叔舟)·봉례랑(奉禮郞)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운서(韻書)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는데, 삼문(三問) 등이 관반(館伴)을 따라 뵈니, 사신이 말하기를,  “이분들은 무슨 벼슬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니, 김하가 말하기를,  “모두 승문원 관원이고, 직책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입니다.”  하고, 수산(壽山)을 가리키면서,  “통사(通事)입니다.”  하였다. 정인지(鄭麟趾)가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서 바른 음(音)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本國)의 음(音)은 처음에 쌍기 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福建州) 사람입니다.”  한즉, 사신이 말하기를,
“복건(福建) 땅의 음(音)이 정히 이 나라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하가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이 대인(大人)에게서 바른 음(音)을 배우고자 하니, 대인(大人)은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편전

수척한 세종이 무둑한 책을 한장한장 펼쳐보고 있다. 그앞에 앉아있는 황희, 김종서, 정린지. 이윽고 세종이 보던 책을 엎으며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수고했소. 참으로 수고했소. 학역재! 이책의 제호를 《동국정운》이라고 합시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과인이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한바 한자어를 우리말로 음을 달고 공을 높이 치하할만하 하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우리글로 뜻풀이를 한 이런 책을 시도하여 만든 집현전학사들의 공을 높이 치하할만 하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황희 《상감마마의 공적이십니다. 성상께옵서 이 나라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길이 자랑할 <훈민정음>을 창제하시지 않았던들 이런책이 어찌 나왔겠소이까?》

 

그러나 세종은 사려깊은 표정이다.

 

《허나 아직 이 책에는 부족점이 많소. 올림자가 충분하지 못하고 한자에 대한 우리 글 음표기와 뜻풀이가 정확치 않은데가 적지 않은듯 하오. 이 책을 속히 완성할 방도가 없겠소?》

 

정린지《주상전하, 명나라 한림원에서 이 책을 선참으로 보여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사옵니다.》

 

황희《전하, 료동땅에 내려와 그 지방 방언을 연구하고 있는 황찬(黃瓚)이란 어학자가 있사옵니다. 이 <동국정운>이 중어-조선어 사전인것 만큰 그 편찬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을 현지에 보내면 명나라 요청도 들어주면서 이 책도 더 풍부히 할수 있을것이옵니다. 명나라 학계에서도 권위가 있는 황찬이오니 집현전 학사 한두사람을 그에게 사절로 파했으면 하옵니다.》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은 명나라 선종때 한림원 소속 어학자.

한림원은 8세기 중국에 설립된 고급 학문연구기관. 중국에서 황실의 문서작성을 담당하고, 고위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한림원은 이 시험의 기본이 되는 유교경전을 연구한 곳(1911년까지 존속). 당나라 현종(玄宗 : 712~756 재위)이 설립하였고 초기에는 학자들뿐 아니라 궁중의 총신들과 역술가·음악가 등도 이 기관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명대(1368~1644)에는 이 기관에 소속된 성원들에게는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성원의 자격도 제한되어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뛰어난 학자들에게만 입회가 허용되었으며

명나라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모인 곳이라 할 수 있음.

 

알릴듯 말듯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종시 얼굴에서 그늘을 지우지 못하는 세종.

 

《그건 마침인데… 지금 료동정세가 살벌하니 그 험지로 귀한 인재들을 어지 보낸단말이요?》

 

정린지《전하, 우리 학사들이 구종별배나 짐군들을 데려가면 위험할듯 싶사옵니다. 료동땅에 들어서서는 명나라 학사들의 복색을 하고 구종도 한두명만 데려가면 토비들이 달려들지 않을듯 싶사옵니다.

 

세종《그렇더라도 학사들에게 무슨 안전책이 있어야 과인이 마음놓고 보낼게 아니겠소?》

 

종서《전하, 이 일은 전하의 만대치적을 빛내이는 일이옵니다. 전하를 위한 일에 신하된 모 어찌 험지나 평지를 가려 몸가짐을 하오이리까? 보내야 하옵니다.》

 

세종 《그럼 사신으로 가는 학사들의 고생이 막심할텐데…

경들의 생각엔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정린지 《주상전하, 신숙주가 적임인듯 하나이다.

신숙주는 명나라 말에 능하고 황학사와도 면식이 깊사옵니다.》

 

세종 《신숙주? 그래그래. 허나 그 험지로 혼자 보내서는 아니되겠고…보다 굳센 사람을 함께 보내야 하오. 경들이 점지하지 못하겠으면 과인이 정하겠노라. 이 일에 쓸만한 인재가 있니라. 엎어놔도 제쳐놔도 한 본새인 그런 사람이 있니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바라보는 대신들.

출처 : 사육신 :: 6회 방송일: 20070823  

 

*대만 민남어사전 董忠司 총편찬/五南圖書出版/2002.11/총1608쪽

 

*크레올어 :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 간에 상인 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피진)가 그 사용자들의 자손에 의하여 모국어화된 언어

 

 

 

原宿玉竹商圈 원숙옥죽상권 / 大统 262 대통 262

야시장 / 고웅의 야시장 분위기는 대북의 그것과 별차이 없다.

지역 불균형 발전, 개발에는 약간 서운함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부산사람이 느끼는 그 심정과 같은 걸까...

 

 

고웅의 3대 상권중 하나

 

 

뒷골목은 동대문의 그것과 비슷하다.

 

 

 

맥도널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골목 / 이대 뒷골목과 비슷

 

 

고웅은 날이 아무리 추워도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인지 음식점 밖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DVD 영화관 /가라오케가 같이 입점해있다.

 

 

 

중앙공원역

 

 

중앙공원역은 아마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역중 하나 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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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푸우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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