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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灣旅行記

 

"차 한잔 더 주실 수 있나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我會使閣啉一杯茶無?
  ghua e sai gorh līm zit būe de bhoro ? 
   과으어사이고림짓붸데보?


G : 我可以再喝一杯茶嗎?

wo ke yi zai he yi bei cha ma?

워크어이짜이흐어이뻬이차마?

 

민남어에서의 可以는 통상적으로 會로 쓰고

使閣 는 '다시'[再]의 의미를 갖는다. 
재밌는 동사는 바로 啉이다. '마시다'라는 의미인데

단순 음역으로 만들어진 글자/독음은 아닌 것 같다(= 喝).

언어가 발달하기 전 먹다라는 동사로 북방어 吃 남방어 食 으로 먹다/마시다를

모두 표현했을 것이고 과실주나 차가 크게 유행하면서

'마시다'  라는 행위의 비중이 커졌을 것이리라(북방어 喝 남방어 飲).

('만끽하다'의 [喫 끽]역시 즐기다라는 의미가 있지 않았던가? )


茶의 대만식 발음은 '데'인데 이것이 만주/몽골에서는 '다'로 발음된다.

한국의 다방(茶房)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한국어의 '다'다구(茶具), 다도(茶道), 다향(茶香), 다회(茶會), 다예(茶藝) 등

어휘의 앞글자로 위치할 경우 '다'로 발음하고 뒤에 올 경우 '차'로 읽는다.

그러므로 '차'이름은 모두 '차'로 읽게 된다.

 

의문어기조사 無[bo] 는 광동과 복건지역 일대에서 흔히 쓰인다.

보통화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대도시, 예를 들면 광주/홍콩 등지는 嗎[ma]가 쓰이는데,

이것은 단순히 평서문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인 것도 아니고

기원은 상당히 유의미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베트남어의 空[khong]과 같은 종류가 아닌가 싶다)

불교영향권에 있어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의문어기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空  /  佛  /  無  /  伐  /  麽  /  嗎

越語  吳語  閩語/粵語  戶語  成都 北方

 *상해어, 오어 '伐' 소주어 '否 ' '佛'가 쓰인다.

 

대만이야기

 

 1. 대만의 대기업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가족단위 경영방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이유로 혈맹이나 지역/방언 중심의 '방'[幇]이 존재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일종의 Guild가 된 것이다. 주요 화교방으로는 호끼엔(Hokkien 福建 복건). 광둥(Guangdong 廣東 광동). 또츄 (Teo Chew 潮州 조주),하이난(Hainan 海南 해남). 학카(Hakka 客家 객가)를 들 수 있다. 말레이시아 쿠칭의 경우, 화인 내부에서도 지역집단에 따라 업종이 분류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시계방은 광동(Cantonese, 廣府, 廣東) 출신, 목수나 대장장이, 세탁업자는 객가(Hakka, 客家) 출신,잡화상은 복건(Hokkien, 福建)이나 조주(Teochew, 潮州) 출신, 음식점이나 커피점,빵집은 해남(Hainan, 海南) 출신이 주로 해 왔다고 한다.

 

2. 화교자본은 안정적인 경영을 위하여 국적이 필요했고 대만은 국적을 주는 대신 자본을 유치하길 원했다.

세계적인 PC제조사 에이서텍도 그런 부류인데, 대부분 중국대륙에 공장을 두고 있어 국민당을 후원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

아뭏튼 대만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했던 원인중 하나는 바로 화교자본이었다.

대만은 매판자본 혹은 세탁을 원하는 화교자본의 피난처가 된 셈이다.

 

3. 객가인의 이동은 총 4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220~618년까지 중원을 두고 전란이 벌어지면서

 양자강 중하류 지역으로 이주 하였다. 그래서 객가인 스스로 중원이 고향이라고 한다

(중원은 하북/호북성 일대라 생각된다).

스스로 당인으로 자처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광동인도 당인을 자처한다).

2차 대이동은 황소의 난으로 인한 것으로 남/서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차 대이동은 송대이다. 금인(만주)이 남하하고 원인(몽골)이 입관하던 시기로

광동성 혜주와 매주로 이동하여 초기 형태의 집단거주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17세기 장헌충의 난(농민봉기)와 남명으로 청조는 대규모 군을 파명

사천지방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게 된다.

이때 객가인은 광동성과 사천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객가인은 늘 중원에서 고위관료를 하며 지내던 재산과 서적 등을 갖고 움직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객가의 전통과 정신이 담겨져 있어 이주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조말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바로 가난했던 광서성의 객가인들과 광동성의 객가였던 홍수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봉기이다.

대만이 청에 복속된 후, 200여년간 남방인의 인구가 20배 가까이 증가했으나 개간할 농토가 적어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으므로 본격적인 농업이민이 전개됐다. 그들은 주로 복건지역의 농민들이었는데 대만에는 이들 복건 출신 외에도 廣東(광동)에서 건너온 客家(객가) 사람들이 전체 주민의 약 10% 가량을 차지했다. 이들 이주민들은 대만의 황무지를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4. 복건인은 일찍 대만에 자리잡아 본성인이 된 경우가 많고

객가인은 생존의 이유로 이주하여 외성인 지위에 있어 국민당 정서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잘 지내는 객가인과 복건인 사이에는 선거철이 다가오면 긴장이 흐르기도 한다.

객가인을 들자면 불안했던 정치상황으로 인해 늘 돈을 모으고 이주할 준비를 하여

 '객가', '객인'으로 불린다. ['家'은 '人'을 의미 ex : 大家好! 여러분 안녕하세요!]  

 

5. “조상의 땅은 팔 수 있어도 조상의 언어는 버릴 수 없다(能賣祖田 不能賣宗言)”

객가인의 자존심이다. 동화되기 힘든 민족이기도 하다. 가장 순수한 한족이라 자처한다.

한편, 중국어의 옛고음을 가장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다. 

사천성 성도의 낙대고진(洛帶古鎭, Luodaiguzhen) 민가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정통의 객가(客家, Kejia)언어와 풍속을 보전하고 있다.

복건(福建) 영정현(永定縣) 민남(민南), 악북(岳北)과 계북(桂북)에 주로 위치한 토루(土樓)

역시 객가건축양식의 하나이다.

 

 

 

워낙 사람이 많아 사진찍기가 수월치 않다.

전자전인지 게임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 아마도 IT산업전반인듯. 

콤팩트와 SLR비율이 아직은 7:3 정도. 그런 이유인지 니콘과 소니, 캐논

간에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PENTAX와 삼성은 그리 주목받진 못하고 있다.

 

 

 

 

온라인게임 홍수...

 

 

 

가족단위형 게임

 

 

참 열심이시다.

 

 

대만의 중소기업이 대단위 그룹화가 되지 못한 것인가...

 

 

소니매장

 

 

 

뭐뭐 나눠주면 인파가 몰리기 마련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똑같군.

 

 

 

아...인간들 진짜 많...

 

 

 

뭐라 재빨리 퀴즈를 내고 재빨리 경품을 내던진다.

낚시하는 모양새

 

 

상담중 / 전시회인 동시에 현장판매이벤트를 벌이는 것 같았다.

재고가 많거나 신제품을 예약받는 다든지 한다면 좋은 아이디어 겠지만

굉장히 어수선해질수도 있겠다.

 

 

처음 보는 브랜드가 많다.

 

 

 

 

 

 

한국은 이미 대기업으로 인해 다 쓸어져버린 시장이 아쉽고 씁쓸하지만

대만의 경우 아직은 중소기업단위가 많아 제품선택이 용이하고 가격대도 괜찮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것인지... 노트북이나 데스크탑이나 퀄리티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장난감

 

 

CHIMEI 많이 들어본...

 

 

뭐 누구나 잘 알는 AMD

 

 

Posted by 푸우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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