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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灣旅行記

 

"오늘 저녁 음식이 많습니까?"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今仔日的暗頓有澎湃無?
  gīn a rit ē àm dng u pōng pai bhoro? 
  
기나짓어암등우퐁파이보?


G : 今天的晚餐豐盛嗎? 

jin tian de wan can feng sheng ma?

진티엔더완찬펑셩마?

 

민남어의 今仔日 [gin a rit/gin a jit] 은 금일

澎湃 [pong pai]는 풍성하다는 의미

 

 

대만이야기

 

 1. 보기에 40세 이상의 성인은 민난어 국어 모두 가능하나, 50세 이상의 성인 노인은

국어 구사능력이 아무래도 떨어지는 것 같다. 민난(복건/복주)어나 객가어구사는

탁월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하는 재래시장에서 외지인이 사업하고자 할 경우, 민난어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민난어 사용인구는 외관상 객가어 보다 압도적이다).

언어문제가 복잡해보일 뿐 그것이 국가안전이나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국어를 주로 구사하는 젊은이 간에 대화(소통)이 단절된 느낌이 있다.  

 MRT 지하철 버스 공항 등 모두 영어 일어 국어 민난 객가어로 안내한다.

 

2. 국민당과 민진당 간의 갈등의 시발점은

바로 국민당의 토지개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외성인이 도래하기 이전 원주민과 본성인간에는 나름대로 조화롭게 살아왔다.

객가인과 복건인은 대만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왔는데, 국민당은 그들의 땅과 원주민의 땅마져 강제로 무상몰수하였다.

국민당정부는 대만으로 옮긴 후, 토지개혁을 감행하였는데 1951∼1953년에 걸쳐

제1단계에서 375감조(減祖)라고 하는 최고 37.5%까지 소작료 제한을 단행하였고,

제2단계에서는 공유지 불하, 제3단계에서는 <경자유기전(耕者有基田)>정책 아래

소작인에게 1910년 20회 균등지불에 의한 지주소유지 매각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지주 10만 6049가구(지주 총가구수의 59.3%)의 소작지 13만 9247㏊가

19만 4823가구(소작농의 64.1%)에게 매도되었다. 우리의 경우, 미군정하의

이승만정권의 토지개혁은 유상으로 단행했다고 하지만 친일파 자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과

매판자본화된 한계가 있었던 반면, 대만은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다.
(한국은 토지자본의 재벌자본화에 성공한 셈)

 

 *대만사회 내에 단기간 내에 본성인 출신 자본가계급의 독자적 성장 가능성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이러한 결과로 본성인과 외성인과의 감정이 좋지 못하다.

 

3. 현재 대만 헌법에는 쑨원의 영향으로 지공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평등한 토지권’(平均地權), ‘토지의 국민 전체 귀속’(土地屬於國民全體),

‘토지 가치의 국민 향유’(土地價值…歸人民共享之)라는 주요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 1949년 정부 수립후 모든 자본기업을 몰수하는 한편,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제를 폐지했다.강제적인 몰수와 분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국민당 정권은 대만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실시하였고, 대만성에 대해 내려진 계엄령은 모택동 사망 후 비로소 해제된다.

  

4. 쑨원(孫文: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광동성 향산현 (香山縣: 지금의 중산시(中山市)) 부근의 취형촌 (翠亨村)의 빈한한 농가 출신의 정치가/혁명가/사상가이다. 동시에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시자이다. 자는 일선(逸仙 광동어 Yat Sen), 본자(本字)는 덕명(德明 호적상 본명),별호는 중산(中山)(일본식 이름). 18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 정부 건설"을 강령으로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

그의 삼민주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그의 사진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지대하다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대만의 국부 (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라는 호칭보다 혁명선행자 (革命先行者)라는 호칭을 쓴다.

쑨원이 국부로 칭송받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볼때, 만주족을 축출하여

청조를 무너뜨린 후 한족주도의 정부를 세웠기 -신해혁명(1911년)을 성공 - 때문일 것이라.

 

  

 

 

두 개동 사이에 Street Mall을 두어 홍보행사가 열리는 것 같다.

겨울에는 7도까지 떨어진다던데, 좀 추울수도 있겠다. 

 

 

 

엄청난 규모의 소비시설...

 

 

고급오피스텔

 

 

대북시청

 

 

신이상권

 

 

무덥다!

 

 

이 땅의 가치는???

 

 

길가는 늘 녹지가 있고 넓직하게 설계되었다.

자전거도 여유있게 다닐 수 있다.

 

 

국부기념관 앞

 

 

중산공원

 

 

중산공원 광장

 

 

크다. 단체관람객이 많아 내에는 도서관과 큰 식당이 있다.

 

 

 

대만인의 국부

 

 

옆문

 

 

비보이 댄스 연습중인 학생들...왜 여기서 할까?

그 열매를 즐기는 것인가?

 

 

대규모 공공시설 주변에는 늘 고급아파트가...

 

 

청조를 끌어내고 한족 정권 수립에 성공한 손문

한족의 국부이다.

 

 

근엄한 분위기

 

 

 

Posted by 푸우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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