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安旅行记
서안어 이야기
베트남 한자음은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중국학자)에 따르면 10세기 당대 장안(唐代長安) 방언에 기초한 독서음이라 한다. 현재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는,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 드 로드가 편찬한 「베트남·포르투갈·라틴어 사전」의 표기법을 기초로 하였다.
물론, 프랑스 지배아래 있던 베트남이 자발적으로 베트남글자를 라틴자로 표시 할 것을 채택한 것은 아니다. 채택 당시 프랑스는 1885년 라틴자 표기체계를 정서법(正書法)으로 하였는데 이는 매우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상황에서 강요된 것이다.
베트남어가 6~7성조이고 고유한 경어(낑족의 모어)가 40%가량된다. 한국어의 이두나 향찰같은 표기가 있어왔으나 고유음을 표시하기에 한계가 있어 쯔놈을 만들었다. 쯔놈은 베트남어의 음운에 맞게 형성의 원리로 조자되었는데, 이러한 글자창제의 강력한 동기는 역시 구음/구어체의 글말을 사용한 기록이다.
쯔놈은 우리의 한글과는 달리 한문과 한자에 관한 지적 수준이 높은 지식인/문인만이
활용할 수 있어 일반대중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한월어
*한월사는 월남어중 고한어에서 파생된 어휘이다.
즉, 월남어의 한자어휘이다. 약 60%를 차지하는데, 단음절 형태의 동사와 조사
그리고 한자어휘에서 파생된 것이다.
대표적인 한월사는 다음과 같다.
áo 衣服
quần 裤子
huyện 县
dẫn 引
cao 高
vạn 万
đội 队
cực kỳ 极其
tuy 虽
thường 常
quốc 国
nhân 人
vĩ 伟
thủ 手
hữu 友等
ngôn 言
ngữ 語
chính 正
thức 式
của 的
dân 民
tộc 族
Kinh 京
ngư 鱼
du 俞
ư 于
tây 西
phán 判
phàm 帆
pháp 法
phát 发
không 空
quang 光
nùng 浓
học 學
tại 在
lịch sử 歷史
định nghĩa 定義
phong phú 豐富
điều hoà 調和
thời sự 時事
phương tiện 方便
văn phòng 文房
phương phi 芳菲
phong lưu 风流
đã(已經)완료형
đang(當, 正當, 正在)진행형
sẽ(將要)미래형(장차)
동사와 결합하여 상황을 표현한다.
ex :
viết(寫)
đã viết(已經寫)
đang viết(正在寫)
sẽ viết(將要寫)
*비교 : 7세기 경부터 문자로 기록된 방괴장자(方塊壯字) 또는 고장자(古壯字)는 베트남민족과 강력한 연관관계가 있는 백월계통의 문자이다. 방괴장자는 그 기록연대가 쯔놈보다 앞서고 형성자의 조자방식(한자파생문자라고도 한다)을 채택하였으며 음운상 공통점이 많다.
1989년에 출판된 고장자 자전(古壯字字典)에는 약 4900자의 낱자와 1만개의 이체자가 수록되어 있는데, 쯔놈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1957년 이후 로마자 표기법이 도입되면서 소멸되었다. 광서좡족자치구내의 지명 표시에 사용되고 있으며(岜 산 崬 삼림)
실제로 상당수의 방괴장자가 한자사전에 수록되었다.
중국정부는 한-장(sino-tibetian)이 아닌 한-좡(sino-zhuang) 통합이 더 시급했던 것일까?
*우리의 한자음이 당음과 명음, 청음이 있다고 하면(상당수는 당음에 가깝다)
베트남의 경우 어휘 60%가 한어에서 차용하였다(漢語借用語).
장안음으로 발음하는 일본한자음을 한음(漢音)이라 부르고
우리와는 달리 오음이 우세하다.
실제로 무석이나 태호 등지의 방언은 일어처럼 들린다.
참고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print.php?mgz_part=shin&n=200605170500000
서안 이야기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秦始皇) :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진시황릉은 섬서성의 대표적 유적지의 하나이다. 모양새로만 보면 산이지만, 내부에는 능이 있다.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75m, 남북 약 384m의 규모로 석류나무가 자란다. 주변에의 노인들은 석류를 따서 행인에게 팔기도 한다(상태가 좋진 않다). 진시황은 황제가 되고 나서 이 능을 만들기 시작, 36년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죽고 나서 말이다.
진시황은 살아 생전 삶을 즐기기 위해 아방궁을 지었고,
사후를 위해 거대한 능과 지하 궁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평생 만들어온 숙적들로 인하여 불안을 이기지 못한 결과일수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이 죄인 70여만 명을 동원하였다고 하는데, 지하수가 세번나올 정도로 깊이 파고 동판을 깔아 관을 안장했다. 지하묘에는 궁전, 망루와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었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을 장치했다.
지하궁전은 계속 발굴중인데 병마용갱은 너비 60m, 길이 210m이며, 지표면으로 부터 약 4.5m의 땅속에 판 10개의 갱마다 병마가 10열로 서있다. 전차대/포대/쇠뇌/화살을 가진 보병대가 있고 현재 전시되는 6천여개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은 깨끗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수준 / 빈곤층이 많으니 당연하다.
도시에 성이 있다니...성에 도시가 있는 것인가?
성이 곧 정부였고, 권력가와 부유층이 거주하던 개념일텐데,
현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성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물론 입장료가 있다.
시외버스터미널 / 고속버스터미널이다.
북경, 심양, 곤명, 란주행도 있다.
바로 저 곳이 근거리를 주로 목적지로 하는 버스터미널...
회족식당에서 산...양고기버거 육협마(肉夹馍). 서안특산이다.
馍[mo]는 방언으로 '찐빵'을 의미. '찐빵'을 겹으로 하여 고기를 넣어서 만들어냈다.
양고기를 갈아 넣어서 보기에는 맛좋아 보이나...비위가 좋던 나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입 깨물고 바로 뱉었다. 버렸다...
병마용행 버스(6원)
시안외각
도착 / 40분 정도 소요(돌아올때는 차가 막혀서 두시간 넘게 걸렸다)
기념촬영하는 곳
내가 어릴적에는 진시황이 시씨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입장료는 90원
뭔가를 판매하는 가판대 / 좌판 등이 복잡하다.
관광지에서는 먹거리가 비싸므로
출발지에서 되도록이면 해결하길 바란다.
병마용 입구
발굴현장 자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유물만을 모아 놓은 박물관
진시황릉(좌)과 병마용(우) / 진시황릉은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방송이나 잡지에서 많이 봐와서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어쨋든 놀라게 된다. 쩐다.
왜 이런 짓을 벌렸을까.
이곳이 바로 제1갱!
규모는 이렇다. 축구장 4개 정도...?
어마어마하다라는 표현 안쓰고 싶었는데...
다시 쓰게 된다. 정말 어마어마하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걸까.
관람도중에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꽤 많다는 이야기...
저것이 새로 발굴 되어 조립된 것.
표정이 하나 하나 생동감 있다!
병마용을 만들 당시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했다니...그럴만 하다.
2/3 호갱은 1호갱 만큼 크진 않다.
말은 참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