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臺灣旅行記

 

"데일 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真燒喔!愛細膩!
  zīn sior o!ài sè rī! 
  진시오! 아이세리

 
G : 很燙喔!要小心! 

hěn tàng wō! yào xiǎo xīn!
헌탕어! 야오샤오신!


 

새로운 민어어휘 

燒[sio] 태우다 / 뜨겁다 cf. P 燙 데이다

細膩 [sè rī] 조심하다 cf. P 細膩 [xì nì]부드럽다 매끄럽다 

*보통화의미와 무관하게 활용 

 

대만이야기

 
1. 시먼띵(西門町)은 타이페이의 고타이페이성(古台北城)의 5대성 중의 하나.
시먼띵 상권은 대북시 최초의 보행자거리로 시먼띵을 기점으로 600m의 거리를 칭하는데,
완니엔(萬年)/라이라이(來來)/청핀(誠品書店) 등 10여개의 대형쇼핑센터와 백화점,
상점가와 영화관, 가라오케 등이 모여 있다. 
고급상점과 대형고급호텔, 전시장이 주로 위치한 동구(東區)에 비해 젊은이들,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많고 대형 영화관 7개가 밀집한 武昌街(우창지예)는 전영가로 불린다.
 
수 많은 음식점과 길거리 음식은 명동에서 본 그것과 별 차이 없다.
시먼띵은 원래 일본 통치시대에 개발된 유흥가였으나 공산화된 중국에서 탈출한
상하이 출신 외성(대륙)인들이 지금처럼 발전 시켰다고 한다.
 
2. 술집은 할리데이 MTV 를 제외하고는 매우 적다. 유흥주점이나 간이주점 조차 매우 보기 어려운데 그 원인을 살펴보자.
우리가 자유중국으로 인식해온 대만은 1987년에 와서야 계염령이 해제되었고 1994년 12월 인권변호사 출신 진수편(첸쉐이비엔 陈水扁)이 시장으로 취임하면서 홍등가(퇴폐향락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다
(정치적인 이유는 차치하고).
 
1999년 3월 27일 타이베이 2개 지역에만 2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다른 모든 공창(公娼)을 문닫게 했다. 2001년 3월 27일 2개 지구의 홍등가 업소들이 문을 닫음으로써
40년간의 대만공창제도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당시 유예기간 2년간 180만원씩 월 생계비를 지급했고 창업교육을
실시하면서 매춘산업도 정리되어갔다(당연히, 관광산업은 침체를 걷게 된다).
그렇게 타이뻬이시는 섹스관광지 이미지를 벗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마사지 업소와 퇴폐이발소 및 호스테스가 있는 술집 등에서의 불법 매춘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공창업소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공중보건 등 오히려 더 많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현지 성인잡지와 일간지에서도 그런 업소들에 관한 기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만의 공창제도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온 후 독신 군인들을 위해 매음을 국가관리하에 두려고 채택.
   

 

 

시먼띵 후면

 

 

 

 

우리라면 내버려 두었을까?

 

 

시먼띵 주변의 주점

 

 

 

과거 타이뻬이

 

 

“대만은 원래 남도어계(南島語系, Austronesian languages)에 속하는 폴리네시안 원주민이 살고 있던 포르모사로 불리는 섬이다. 포르투갈 선원이 타이완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섬"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으로, 아직도 구미권에서 일부 쓰인다. 중국역사 범주내에서 중국적 아이덴티티를 가지는 곳은 아니었지만 15세기 말엽 명(明)나라가 쇠하면서 복건성(福建省) 주민(福建人Hokkian)이 이주하면서 중국역사 내로 편입되었다. ”

"1661년 복건성 출신 명나라 장군 정성공(鄭成功)이 망명해오면서 네덜란드인을 추방하고

대만을 지배하였으나 곧 청에 의해 정벌되고(1684년) 이 때부터 한족의 토착화가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의 내용에 의해 요동반도와 대만과 함께 열도를 전리품으로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아 오키나와현에 편입시키게 된다. "

"일본인 지배하에 시먼띵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집중거주하였고

그 일대도 개발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시먼띵 상권이다."

 

 

일거시대 당시 관공서에서 사용했던 인장

 

 

2층 강연장 입구

 

 

훌륭하다!

 

 

 

1층은 까페테리아로 활용되고 파티 연회장으로도 쓰인다.

 

 

이런시설이...우리에게도 남아있는지...

 

 

시먼띵 좌측 용산사로 가는 길 

이리 저리 치이는 스쿠터(Scooter)

현지어로는 踏板车 [tà bǎn chē]
외래어는 摩托车 [mo tuo chē]

 

대만을 이해하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대만을 접수한 것은 국공(國共)분열시기의 국민당이다.

대만성 행정장관으로 부임한 첸이(陳儀)는 대만인들을 왜놈황민화(皇民化) 교육을 받은 노예라 하여 동등한 중국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였다. 한편 그 나름의 질서가 있어왔던 일본의 문민통치를 경험한 주민(원주민/선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당원은 일본식민통치자들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악랄했으며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점한 점령군에 불과했다. 대륙출신의 국민당 외성인(外省人)과 대만 본성인(本省人)간의 충돌은 불가피.

이런 시기에 외제담배를 팔던 노파를 세무경찰이 총 개머리로 으깨버린 참사가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타이뻬이시에서 1947년 2월 28일 벌어진 '얼얼바 2.28사건'!

이 사건으로 대만인 2만 8천 명이 살해됐고 온 하천이 피로 물들었다.

1949년 5월 19일 계엄령이 내려지고 고웅 미려도사건 이후

민주화에 대한 끝없는 열망아래 1987년 7월 15일 계엄령 해제에 이르기까지

38년간 85%에 달하는 대만 본성인들은 백색테러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국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3-11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10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8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7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6  (0) 2010.03.09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채소를 먹으면 너의 몸에 좋아"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食青菜對汝的身體有幫助。
  ziah cēn/cīn cai dùi li ē sīn tè u bāng zō  
  지아체차이또이리에신테우방조

 
G : 吃蔬菜對你的身體有幫助。

chī shū cài duì nǐ de shēn tǐ yǒu bāng zhù。
츠슈차이뚜에이니더션티여우방쭈


 

새로운 민어어휘 

青菜 [cēn/cīn cai] 채소 蔬菜


 

대만이야기

 
1. 서문역은 대북에 위치했던 고타이페이성(古台北城)의 5대성 중의 하나
인데 일거시대 당시 행정단위 '띵(町)'을 그대로 쓰고 있다. '띵(町)'을 지역(地方)의 의미로도 쓴다.
원래 1950~60년대에 대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동부상권과는 달리 과거의 문화와 뒤섞여 있다.
용산사 동선과 더불어 이런 저런 재래상권의 풍경도 갖추고 있는데,
대만의 고전적인 주택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 나름대로의 유행도 같이 하는데 대부분의 것은 일본의 그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젊은이들의 거리가 된 것이다. 한국의 명동과 뭐 다를 바는 없다. 
 
2, 대북(台北)에는 3대 상권이 있다.
여행을 간다면 간단히 그 위치를 확인해보자.
시먼띵(西門町)의 경우, 영화와 패션의 거리라 할 수 있고
대북역 중심의 쭝샤오(忠孝) 거리는 소고백화점SOGO과 일본계 백화점이
자리한다. 학원도 집중해 있어 학생들로 인산 인해를 이룬다.
동부상권의 신이(信義)거리는 명품 등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하다.
101타워와 워너빌리지가 위치해있다.
전시컨벤션센터와 대형 쇼핑물, 명품의류점은
서울의 코엑스몰과 엇비슷하다.
 

 

 

시먼띵 상권 중심가에서 인디언의 연주 / 소수민족은 아닌 것 같다.

 

 

대반점 / 3층 이상은 호텔이고 1/2층은 음식점으로 구성된 건물이 많다.

가격대는 하루 4~8만원대, 부담은 없는 편이나 시설 수준이나 청결도는 제각각이다.

 

 

1/2 층 음식점, 음반점, 3/4층 Fitness Centre와 5/6/7/8층은 영화관이 입점된 건축물

 

 

음식점이 너무 너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SonyStyle 매장

 

 

오토바이는 필수! / 오토바이 불법 주차 단속도 자주 보인다.

 

 

 

시먼띵 상권은 하루 정도면 족하다!

 

 

Party World 쇼핑몰!  

 

 

장기자랑...아이들을 동원!

 

 

좌측이 서문이 보인다!

 

 

문화제 기간...100주년이 된 것인가?

 

 

과거 철도역으로 쓰였으나 도심개발 이후 각종 문화행사장소로 쓰이고 있다. 

2층은 극장으로도 쓰일 수 있는 강연장이고 1층은 건물이 길쭉하여 실내 스트리트몰처럼
되어있어 전시장의 부쓰처럼 활용된다. 강연장은 충분히 영화상영관으로 개조가능한 규모.
생각보다 기둥이 많지 않고 1/2층 간에 이동이 편하다.

 

 

시먼띵 광장에서 공연 한 마당!

 

 

차그릇...다기!

 

 

뭐...이 정도면 훌륭한 시설이다. 과거 잔재라 하여 무작정 때려 부수지 말고 사료적 가치가 있다면

다른 방면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시먼띵 후방은 말그대로 Bar 맥주거리...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며 즐긴다.

실은 대북시에서 Bar를 찾기는 참으로...어려웠다.

 

 

'국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3-10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9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7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6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5  (0) 2010.03.09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아이들은 편식하지 말고, 그릇에 놓인 음식은 모두 먹어야죠."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囝仔人毋通撿食,愛共盤仔內的物件食予清氣。
  ghin a lang m tāng ging ziah,ài ga būan à lāi ē mih giān ziah hō cīng ki 
  낀아랑음탕낑지아, 아이가분아라이에미기아지아호칭키

 
G : 小孩子不要挑食,要把盤子裡的東西都吃完。

xiǎo hái zǐ bù yào tiāo shí,yào bǎ pán zǐ lǐ de dōng xī dōu chī wán。
샤오하이즈부야오티아오스, 야오바판즈리더똥시또우츠완


 

새로운 민어어휘 

囝仔人[ghin a lang ] 어린이 小孩子

撿食[ging ziah] 편식 挑食

盤仔[būan à] 쟁반 盤子

內[lāi] ~의 裡 

物件 [mih giān] 물건, 것 東西

予[ho] ~도 都

清气 [cīng ki/qīng qì] 모두 完

食乎清氣(呷乎了) 먹어치우다 / 깨끗이 먹다(全部吃完)
 

대만이야기

 
1. 호우샤오시엔 (侯孝賢, Hou Hsiao Hsien)은 1947년 4월 8일 중국 광동성 매현에서 태어났으며 
이듬해 대만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고 대만 남부지역에서 성장하였다. 1969년 군복무를 마친 후
대만국립예술아카데미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였다.
대만 뉴웨이브 1세대 감독이다.
그는 활용되지 않던 미대사관을 불하받아
리모델링하여 독립영화관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대북의 집 (臺北之家 Taipei Film House)이다.
 
2. 오끼나와의 자국영토 주장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 실제로 1970년대 와서야 합병 완료 -
일본은 대만이 오끼나와 원주민을 살해한 죄를 묻겠다는 명목으로 청일전쟁을 벌였는데,
승전함에 따라 대만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대만은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식민정책에 따라 극심한 탄압정책(일본의 제도와 언어를 강요)을 편 반면,
대동아 공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만을 군수물자 생산기지로 삼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처럼 공업화 근대화된 것이다.
실제로 중일전쟁 기간에는 일본의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허나, 1945년 대만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동시에 민남어와 객가어가 모어였던 그들에게 보통화가 강요되었다.
호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 (悲情城市: A City Of Sadness) 1989년> 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만여성분들 몸이 얇은 편...화장도 진하다.
 
 
기념품 및 팬시상품을 판매
 
 
이것은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실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저렇게 하면 조명만으로도 분위기가 살아난다.
 
 
 
상영작
 
 
상영관 입구
 
 
88석 규모의 단관 / 강당으로 쓰였을 듯.
 
 
2층의 테라스에서도 강연과 세미나가 한창이었다.
탁 트인 설계가 아트하우스의 격을 살린다.
 
 
1층 까페 로비
 
 
파티도 얼마든지 가능
 
 
 
2층의 고급 레스토랑 / 식단이나 퀄리티가 예사롭지 않다.
 
 
영화제가 계속된다.
 
 
이런 시설? 여의도에 모모모 대사관 ^^
 
 
접근성은 괜찮은 편
지하철하차 하여 도보 5분이다.
 
 
단관이라 현금흐름이 어떤지는 몰라도
시설의 Mix는 마음에 든다. 공간 활용도 훌륭하다.
 
 
 

'국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3-9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8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6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5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4  (0) 2010.03.09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식전에는 군것질을 많이 하지 마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毋通佇飯前食赫呢濟四秀仔。
  m tāng di beng zing ziah hià ni ze sì siu à 

음탕디벙징지아히아니제시시우하

 
G : 不要在飯前吃那麼多零食。  
bù yào zài fàn qián chī nà má duō líng shí
 뿌야오짜이판치엔츠나머뚜오링스


 

새로운 민어어휘 

通 [tāng] 하려 하다 ~要

赫呢 [hià ni] 그렇게 那麼

四秀仔 [sì siu à] 군것질 零食


대만이야기

 
1. 대만의 주부들은 우리처럼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식재료를 일일히 챙기는 것이
아닌 당장 간단히 조리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의 것(Ready to Cook / Ready to Eat)을 선호한다.
예컨데, 면따로 팔고 국물 따로 판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사먹는다. 
  
2. 대북 중심가에 비해 북부상권인 사림은 대북 주류 서민과 고급아파트 주민들이 섞여 있다.
중심가에 비해 공기가 좋아 살기는 좋지만 대만의 재래식 주택(Shop house)이 대부분이고
중심가의 학원가와는 거리가 있다. 대체로 그런식으로 지가의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아줌마들!

 

 

높지 않은 재래상권 주변의 저층 아파트

 

 

나사렛 계통 개신 교회

 

 

 

재래시장 / 영등포 시장과 비슷

 

 

입구의 웬 식당

 

 

간단한 라면, 맛은 그다지...왜 이리 싱거운 거야!

 

 

고추를 그나마 엄청 얹어야 매콤하다!

 

 

궁금해서 가까이 가까이...가까이...

 

 

10/20대때는 대만의 복음화를 위해 참 많이 기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참으로 무지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차장도 넓고 접근성도 좋은 재래시장

좀더 청결하다고 할까?

 

 

집마다 스쿠터가 있다!

 

 

자동차 보다는 유용하고 친환경적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DIY 홀세일마트인 B&Q

 

 

살짝 들어가 보았다.

 

 

 

으으... 정말 많다!

 

 

고급 아파트 / 저 모양새는 대만식인 것인가?

 

 

 

'국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3-7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6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4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3  (0) 2010.03.09
臺灣旅行記 20080803-2  (0) 2010.03.09
Posted by 푸우밴드
|

20080923 주장

국외여행기 2010. 3. 9. 13:35

周庄

 

Nikon D1 / Sigma 18-50mm

 

"黃山集中國山川之美,周庄集中國水鄕之美"

중국 산천의 아름다움은 황산에 모여 있고,

수향의 아름다움은 주장에 모여있다

 

상해 체육관 터미널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주장(周庄).

노를 저으며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동양의 베니스라 하기엔 좀 작은 규모. 지방관리 주제공이 자신의 땅인

이곳에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물 위에 사당, 건물을 지어주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은혜를 기려 지명을 周庄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주장(周庄)은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태호안에 떠있는

일종의 섬으로 태호의 물을 막아 인공적으로 만든 운하이다. 

 

*주장은 '주씨(周氏) 가문의 장원(莊園). 영지(領地). 봉토(封土)'를 의미

(홈페이지 참고 http://www.zhouzhuang.com/en/first.htm )

 

 

 

주장의 수로

 

 

한국도 이런 곳이 있던가??? / 주장은 강소성 소주의 부근이다.

그런 이유로 소주/주장 패키지 코스가 있다. 200원 이내로 저렴한 편.

 

 

东坡肉 동파육 또는 东坡肘子 동파주자
상해인은 적방육(蹄膀肉)이라 부른다.

느끼는 하지만 먹을 만하다.

 

 

함채 咸菜 / 절인 야채

새콤한 것이 볶음밥과 먹으면 그만이다.

한국의 절인 김치 맛이다.

 

 

달팽이(蜗牛) 두부스프(?)

 

 

양저우 볶음밥(扬州炒饭)

 

 

Posted by 푸우밴드
|

上海 Bar街

흥산로 衡山路

 

상해에는 3대 바거리가 있다.

흥산로(衡山路) / 무명남로(茂名南路) / 거록로(巨鹿路)가 그것이다.

무명남로(茂名南路)는 디스코바/장이 많고 외국인들이 많다.

그에 반해 흥산로는 좀 점잖다고 해야 할까.

관광객을 보면 웬 여자분들이 따라 붙는데 조심해야 한다.

한국인을 알아 보고는 한국어로 뭐라 하지만 그에 속지 말도록.

그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뭔가를 가득 시키고는 계산하도록 한다).

 

 

흥산로는 상해의 대표적인 바거리로 매우 깔끔한 편

고급음식점도 몰려 있다. 다만, 맥주의 가격은 서울 고급바 수준

 

 

고급바에는 무료함을 달래 고자 하는 외국인이 있기 마련.

하기는 상해 거주 및 취업 외국인이 꽤 많기 때문이리라. 

 

 

2005년 상해시 노동보장국 통계에 102개 국의 4만 여 명의 외국인이

상해에서 취업증을 만들었는데 그 중 인원수가 10위 이내인 나라는

일본, 미국, 한국, 싱가폴, 말레이지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캐나다 그리고 영국순.

 

매년 상해로 사업하거나 여행을 오는 외국인은 크게 증가하는데 낯선 정서로 인한 문화적 쇼크를 해소하고자 외국인들은 긴장된 일을 하고 난 후 바(Bar)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거나 혹은 습관적으로 찾는다.

 

흥산로(衡山路)에 있는 Cotton Club은 상해에서 가장 좋은 Jazz & Blues Bar이고

특히 흥산지로(衡山支路) George V Bar 는 내외장재가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가장 사치스러운 것은 이태리 통가죽 메뉴판).

이 두 바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영사관에 일하는 중년들이다.

 

Nikon D1

Sigma 18-50mm / F3.5-5.6 DC

 

렌즈스펙

 

- 렌즈 구성 : 8군 8매
- 화각 : 76.5°-31.7°
- 조리개 날개 매수 : 7
- 최소 조리개 수치 : F22
- 최단 촬영 거리 : 25cm
- 최대 배율 : 1:3.5
- 필터 사이즈 : 58mm
- 최대지름·전체 길이 : 67.5mm×60mm
- 중량 : 245g

가격대 성능비 최고

(여행용으로 손색없다!)

 

 

'국외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0912 北京旅行&#35760;-01  (0) 2010.03.09
20090528 &#24191;州旅行&#35760;-01  (0) 2010.03.09
20080923 주장  (0) 2010.03.09
20070921 상해외탄  (0) 2010.03.09
1960년 8월 출토된 명조 유물  (0) 2010.03.09
Posted by 푸우밴드
|

 

상해외탄(上海外滩)

 

Nikon D1/Sigma 18-50mm

 


상해의 상흔(伤痕)

 

상해 포서(浦西)에는 외탄지구가 자리잡고 있는데,
1.5km의 외탄지구는 160여년전 불평등하게 맺은 난징조약으로 자리 잡은 외세,
즉 영국(후먼조약), 프랑스(왕샤조약)가 '아편전쟁' 이후 조차지로

상해에 거점을 두면서 만들어진 상업지역이다.

 

이것이 황포강을 중심으로 포서(浦西)의 100년된 도시와 포동(浦东)의

최신식 10년된 도시가 공존하게 된 원인이다.

외탄(外滩)은 조계시절 당시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저녁시간 대에

경관조명으로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상해의 근현대 160여년의 역사는 치욕스런 조약으로 시작되었다.

영국과의 아편전쟁(鴉片戰爭)의 결과인 난징조약은

중국 근대사에 있어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영국인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영국인 상인이 내륙을 어디에나 진출할 수 있다. 
영국인이 죄를 범하면, 영국 관헌이 체포하고, 중국에 알리고,

영국의 관헌이 조사하는 영사재판권을 인정한다.
만약 청나라가 다른 나라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경우,

영국보다 조건이 유리하면, 영국에도 그 조건을 인정한다.

즉, 청조는 영국에 대해 최혜국대우를 우선 인정한다.

 

*식민지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전략 전술 패턴은

일본과 조선간에도 적용되게 이른다(강화도조약).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홍콩의 할양, 상해와 광동 이외에 다섯항구를 개방해야 했다.

상해시 외탄지구의 공공시설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상흔이 관광지가 된 셈이다.
상해를 여행하고자 하는 여행자가 숙박을 잡을 때도

기준으로 삼는 지역은 바로 외탄이다.

 

 

 

 

 

 

 

바다위의 뭍 상해(上海)라는 지명처럼 워낙 지대가 낮아

제방을 쌓았는데 그 축선이 현재 외탄관광의 주요 동선이다.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신을 완전히 묶으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鞋帶縛互好。
ē dua bak hō hòr 
에두아박흐흐

 
G : 鞋帶綁好。 

xié dài bǎng hǎo

시에따이방하오


 

새로운 민어어휘 

缚 [fù M: bak]  [동] (끈이나 줄로) 묶다. 감다. 绑 [bǎng]

 

대만이야기

 
1. 여행은 여러번 다녀 보고 해야겠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얼만큼 준비했냐에 달린 것 같다.

현지에 대한 조사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물가나 교통체계는 무의미한 경우가 자주 있다.

조사작업은 인터넷과 여행책자 혹은 경제서 역사서 등을 보면 찾아 낼 수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편견이 될 필요가 없는 정도에 그쳐야 할 것 같다.

편견은 상상력을 막는 벽이 될 수도 있고

예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도 있겠다.

 

2. 고웅이 가진 특색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분명한 과제가 있겠지만, 그 보다 필요한 것은

스토리 아니겠나. 근대사 이전 고대사부터 기록되어온 그 무엇이랄까.

사면이 바다인 섬나라로 성장하고 생존하기 위하여는 '관광'이라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나 노트북 따위 제조업은 이미 상당수 중국에 있고

자동차산업은 전무하다 할 수 있다(기아 베르나 부품 공장도 중국에 팔려서

지금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부품을 역수입한단다).

모양새가 이렇다면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교역항으로서의 지위에 너무 목을 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 체육관이 있다니, 한국의 잠실체육관처럼

접근성이 아주 좋다. 엔간한 시설은 동일 상권 내에 있어 6시간(?)이면 충분히 돌 수 있다.

지금즘이면 정비/보수가 모두 마쳤을 듯...

 

 

 

2009 세계운동회(2009 WORLD GAMES)를 잘 치뤄내길 바란다!

입장권은 판매 개시 했단다. (http://www.allgenki.net/ticket/)

http://www.worldgames2009.tw/wg2009/eng/info_spectators1.php 

 

 

돔 운동장

 

 

중고등학교 / 시설은 정말 빠지지 않는다.

 

 

역시 대륙과는 달리 한산하고 조용하며 깨끗하다.

 

 

아아 땡볕더위가 시작된다.

죽을 것 같다. 10시즘 되면 직광이...

 

 

후역 / 왜 후인가? 왜냐면 고웅기차역 다음역이기 때문.

 

 

서울의 9호선이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대만인의 체형이 좀 작아서인지 지하철이 크지 않다.

 

 

 

 

 

오복이로 중산로 중화로에 연결된 쇼핑가는 명동보다는 작지만 꽤 규모있다.

대통(大統), 대립(大立), 신광삼월(新光三越), 한신(漢神) 등의 대형 백화점과

대형 영화관이 자리하고 있으나 타이뻬이 수준은 아니다.

일본 한신타이거즈와 관련 있는 것일까?

한신백화점(阪神百貨店)의 阪神과는 다른데...^^;;;

 

 

 

*高雄原名有二:一曰打狗,一曰「打鼓」,在明、清二代文獻中,此二種說法兼被採用。「打狗」一說是因十五世紀以前,高雄港口一帶原為平埔族馬卡達奧人居住地,稱之為 打狗(Takau)社及竹林族,Takau一語為竹林之義,打狗乃其音譯。

早在十七世紀,高雄港邊的山上,有當地住民“打狗社”古址。此山就叫打狗山,人們也俗稱這片港灣土地為“打狗”。正如基隆形狀像雞籠,也就稱之為“雞籠”。打狗、雞籠,一南一北,在台灣島上相映成趣。 荷蘭海盜入侵台灣島以後,仍按“打狗”的音譯稱這裡為TANKOYA。1895年甲午戰爭失敗,清廷把台灣寶島割讓給日本。1923年,日本裕仁太子(就是後來發動侵華戰爭直至投降的裕仁天皇)夜宿打狗山賓館。4月29日是他的生日,日本人覺打狗山太不文雅,有損太子和日本人聲譽,就把此山改稱為壽山。但當地老百姓仍照常稱為打狗山,或者由諧音稱為打鼓山。 鼓山的取名有它一定道理,因為一水相隔的對面,有一條長約11.5公里的沙洲,形狀像一根旗桿。而旗桿頂端有一座小山像一面旗幟,叫旗山。這樣就“旗鼓相當”,有旗山,也有鼓山,隔水相對。所以高雄稱打狗,也可稱旗後。 就在這旗山、鼓山之間的波斯灣內側有個大瀉湖,因風平浪靜,可躲避風濤,停泊大量船舶,當地人俗稱為“內海仔”,從而使高雄自古就成為避風良港。

 

'일상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5-03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5-02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8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7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6  (0) 2010.03.08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소매를 걷어 올리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手袖撇起來
  ciu ng bīh ki lai  
시우응삐키라이

 
G : 袖子捲起來。 

xiù zǐ juǎn qǐ lái

시우즈주안치라이


 

새로운 민어어휘 

手袖 [ciu ng] 소매 袖子

撇 [bih] 걷다 捲

 

대만이야기

 
1. 대만 고웅시은 대부분 민남어와 객가어 화자이나 중국의 공산화 이후

대륙인들도 상당수 이주해왔다. 이주 초기는 1858년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면서이고,

각종 물자의 집적지 또는 집하지로 번성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일본의 남방 침략기지로 군항(軍港)의 역할을 하였다.

원양어업 회사와 중공업 플랜트가 위치해있다(항내에는 가공수출단지가 위치).

외관상 대만의 제 2도시이나 입지와 규모, 내용은 한국의 인천 같은 곳이다.

고속철도 외에 중산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남동쪽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멀티스크린 영화관 / 대북도 그렇듯이

1990년대에서 멈춘 것 같다.

 

 

그나마 제일 나은 바...

 

 

가격은 5000~6000원대

 

 

현지에서 만난 고웅인 황옥영양이 말을 걸어주어 심심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의 역사와 외모, 정치적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였는데

내성인과 외성인간에 정서적인 간극을 느낄 수 있었다.

 

 

바텐더는 화련출신으로 이쁘장하다.

키는 작은 편 / 화련은 한국의 강릉같은 곳

아메이족의 본거지이다.

 

 

아침 오후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샌드위치를 판매한다.

 

 

의외로 외국인이 꽤 보이는데, 대부분 유학생이다.

 

 

상당히 어둡다.

 

 

가격이나 분위기는 부담없는 편

상해의 신천지 제외한 일반적인 "바" 수준

 

 

'일상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5-02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5-01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7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6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5  (0) 2010.03.08
Posted by 푸우밴드
|

 

臺灣旅行記

 

"바지 지퍼를 완전히 올리세요."

 

M 台語(閩南話)

 

G 國語

 

M :  共褲的拉鏈脫予好。
  ga ko e ziāh kuo(la-liàn) tùa hō hòr  
가코에지아쿠투아호흐

 [hor발음은 '흐'에 가깝게]

 
G : 把褲子的拉鏈拉好。 

bǎ kù zǐ de lā liàn lā hǎo

바쿠즈더라리엔라하오


 

새로운 민어어휘 

共 [ga] 쥐다, 잡다 把

褲 [ko] 바지 褲子

拉鏈 [ziāh kuo] 지퍼 拉鏈

脫予 [tùa hō] 올리다 拉 

 

*참고

처지문(把자문) 형태로 把 + 목적어 + 술어 + 기타 순.

  

 

 

대만이야기

 
1. 중앙공원 인근의 환승역(O5/R10)인 미려도(美麗島)는

영어로 Formosa Boulevard Station이다.

Formosa는 스페인어로 Beautiful island라는 의미.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이겠다. 

 

2. 고웅의 언어 중 주류는 바로 민어이다(민남어 Bâm-lâm-gu)

민동/민남/민중/보선방언 중 기준은 민남의 복건성하문(福建省 厦門)방언이다.

하문방언은 복건성의 장주어와 천주어가 상호 침투하여 만들어진 크레올(creole)어이다. 

민어는 중국어의 모든 방언중에서도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명청 당시의 음운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

한국은 조선 당시 각지방마다 한자음이 달랐는데 그것을 통일시키고자

신숙주를 통해 동국정운을 편찬토록 하였다. 그때,

참고가 된 중국인이 바로 복주사람이었다.

 

현대 북경어는 현존 방언중 자음이 가장 적어 4백음 정도이고 가장 많다는 복건어도 8백 음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한자를 표기하는데 당연히 동음이자가 생기기 마련.

이 단계에서는 성조의 문제가 시작된다. 8~9성조의 한어가 아닌 북방 만족이 배워 사용하던

4성조 동북어(현재의 보통화)가 주류화되면서 큰 소실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1450년(세종32) 명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가 그랬다. 상께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와 성삼문·신숙주 등에게 운서(韻書)를 묻게 하셨다. 태평관에 찾아가 상견례를 마친 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른 음을 알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두 대인을 뵈었으니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사신은 “이 나라의 음이 복건주의 음과 똑같으니 그 음을 따라 하면 되겠소”라고 대답했다. 나와 신숙주는 마침 가지고 간 ‘홍무정운(洪武正韻)’을 가지고 음운의 같고 다름을 강론했다."

출처 : 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6/04/200706040500040/200706040500040_4.html

  

【세종32년 1월3일】직 집현전(直集賢殿) 성삼문(成三問)·응교(應敎) 신숙주(申叔舟)·봉례랑(奉禮郞)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운서(韻書)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는데, 삼문(三問) 등이 관반(館伴)을 따라 뵈니, 사신이 말하기를,  “이분들은 무슨 벼슬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니, 김하가 말하기를,  “모두 승문원 관원이고, 직책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입니다.”  하고, 수산(壽山)을 가리키면서,  “통사(通事)입니다.”  하였다. 정인지(鄭麟趾)가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서 바른 음(音)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本國)의 음(音)은 처음에 쌍기 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福建州) 사람입니다.”  한즉, 사신이 말하기를,
“복건(福建) 땅의 음(音)이 정히 이 나라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하가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이 대인(大人)에게서 바른 음(音)을 배우고자 하니, 대인(大人)은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편전

수척한 세종이 무둑한 책을 한장한장 펼쳐보고 있다. 그앞에 앉아있는 황희, 김종서, 정린지. 이윽고 세종이 보던 책을 엎으며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수고했소. 참으로 수고했소. 학역재! 이책의 제호를 《동국정운》이라고 합시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과인이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한바 한자어를 우리말로 음을 달고 공을 높이 치하할만하 하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우리글로 뜻풀이를 한 이런 책을 시도하여 만든 집현전학사들의 공을 높이 치하할만 하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황희 《상감마마의 공적이십니다. 성상께옵서 이 나라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길이 자랑할 <훈민정음>을 창제하시지 않았던들 이런책이 어찌 나왔겠소이까?》

 

그러나 세종은 사려깊은 표정이다.

 

《허나 아직 이 책에는 부족점이 많소. 올림자가 충분하지 못하고 한자에 대한 우리 글 음표기와 뜻풀이가 정확치 않은데가 적지 않은듯 하오. 이 책을 속히 완성할 방도가 없겠소?》

 

정린지《주상전하, 명나라 한림원에서 이 책을 선참으로 보여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사옵니다.》

 

황희《전하, 료동땅에 내려와 그 지방 방언을 연구하고 있는 황찬(黃瓚)이란 어학자가 있사옵니다. 이 <동국정운>이 중어-조선어 사전인것 만큰 그 편찬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을 현지에 보내면 명나라 요청도 들어주면서 이 책도 더 풍부히 할수 있을것이옵니다. 명나라 학계에서도 권위가 있는 황찬이오니 집현전 학사 한두사람을 그에게 사절로 파했으면 하옵니다.》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은 명나라 선종때 한림원 소속 어학자.

한림원은 8세기 중국에 설립된 고급 학문연구기관. 중국에서 황실의 문서작성을 담당하고, 고위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한림원은 이 시험의 기본이 되는 유교경전을 연구한 곳(1911년까지 존속). 당나라 현종(玄宗 : 712~756 재위)이 설립하였고 초기에는 학자들뿐 아니라 궁중의 총신들과 역술가·음악가 등도 이 기관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명대(1368~1644)에는 이 기관에 소속된 성원들에게는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성원의 자격도 제한되어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뛰어난 학자들에게만 입회가 허용되었으며

명나라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모인 곳이라 할 수 있음.

 

알릴듯 말듯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종시 얼굴에서 그늘을 지우지 못하는 세종.

 

《그건 마침인데… 지금 료동정세가 살벌하니 그 험지로 귀한 인재들을 어지 보낸단말이요?》

 

정린지《전하, 우리 학사들이 구종별배나 짐군들을 데려가면 위험할듯 싶사옵니다. 료동땅에 들어서서는 명나라 학사들의 복색을 하고 구종도 한두명만 데려가면 토비들이 달려들지 않을듯 싶사옵니다.

 

세종《그렇더라도 학사들에게 무슨 안전책이 있어야 과인이 마음놓고 보낼게 아니겠소?》

 

종서《전하, 이 일은 전하의 만대치적을 빛내이는 일이옵니다. 전하를 위한 일에 신하된 모 어찌 험지나 평지를 가려 몸가짐을 하오이리까? 보내야 하옵니다.》

 

세종 《그럼 사신으로 가는 학사들의 고생이 막심할텐데…

경들의 생각엔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정린지 《주상전하, 신숙주가 적임인듯 하나이다.

신숙주는 명나라 말에 능하고 황학사와도 면식이 깊사옵니다.》

 

세종 《신숙주? 그래그래. 허나 그 험지로 혼자 보내서는 아니되겠고…보다 굳센 사람을 함께 보내야 하오. 경들이 점지하지 못하겠으면 과인이 정하겠노라. 이 일에 쓸만한 인재가 있니라. 엎어놔도 제쳐놔도 한 본새인 그런 사람이 있니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바라보는 대신들.

출처 : 사육신 :: 6회 방송일: 20070823  

 

*대만 민남어사전 董忠司 총편찬/五南圖書出版/2002.11/총1608쪽

 

*크레올어 :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 간에 상인 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피진)가 그 사용자들의 자손에 의하여 모국어화된 언어

 

 

 

原宿玉竹商圈 원숙옥죽상권 / 大统 262 대통 262

야시장 / 고웅의 야시장 분위기는 대북의 그것과 별차이 없다.

지역 불균형 발전, 개발에는 약간 서운함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부산사람이 느끼는 그 심정과 같은 걸까...

 

 

고웅의 3대 상권중 하나

 

 

뒷골목은 동대문의 그것과 비슷하다.

 

 

 

맥도널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골목 / 이대 뒷골목과 비슷

 

 

고웅은 날이 아무리 추워도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인지 음식점 밖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DVD 영화관 /가라오케가 같이 입점해있다.

 

 

 

중앙공원역

 

 

중앙공원역은 아마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역중 하나 일 것

 

'일상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臺灣旅行記 20080805-01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8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6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5  (0) 2010.03.08
臺灣旅行記 20080804-04  (0) 2010.03.08
Posted by 푸우밴드
|